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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1. 21世 〉68. <태사공>옥천조공낙현기적비(玉川趙公樂賢紀蹟碑)
1. 문헌 목록 〉21. 21世 〉70. <태사공>부천거사휘장섭행장(釜川居士諱章燮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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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태사공>죽사공묘갈서(竹史公墓碣叙)휘기섭(諱驥燮)
竹史公墓碣叙(諱驥燮) 粤若古原栗縣金城之東有三十餘門人葬其師之南土爲口實焉師之謂誰曰趙公驥燮京良其字本玉川名族寔金紫光祿大夫太師公璵之遺裔而入國朝累葉爲燀爀乃涉潭府東亦有明經一科至曾祖諱墩錫祖諱漢泳考曰東哲牙任階俱以行蒙聞外祖曰光山金鉉碩直文靖公台鉉后也公幼就仲父學仲父患其才過如河洛之奇耦蓍揲之擣扐故不傳而間多有自析處中身慮家勢未振稍尚擧業而克不中迺傍馬巖闢數間舍愛鄕曲之生徒來懇墾誨飭恒説孝悌本也文藝末也吾嘗隷末而傷本也夥遂爲終身之痛甚或至涕泗焉歲値白犬聞五賦之再捺冲和蕭散燮爲倔強滭沸頻與山耆谷叟放曠於流峙間吟如謳如人不識其由中戊午臘月二十一日承聞 上皇遺弓令進糜飲越五日癸卯率門人子舍就後園淨處號冤痛絶良久糜定峽中老少退徃慰哭始識向歲如謳如吟之意也厥後九年復掩蓽如常至丙寅三月門人呼臯于山齋距生年 哲廟壬子爲七十五配慶州李氏圭淵女寔文忠公益齋后夙有壺範只育三女適高碩柱朴燕相崔台鉉皆名族也取仲弟斗燮所生喆河爲嗣子仍娶玉川大姓薛氏門稍有餘蔭云是歲春正俄所謂三十餘人士齊集于時習菴僉言我馬巖先師大朞時近而雖祭田姑未置表石斷不可延遣余宗人洛彬累累懇託曰固知子持哀封管然但叙而不銘先哲有例如是亦幸矣凡三顧而語益勤竊念洪滔以來倫彝淪尚於君親未肯哀縞者有之况於塾師深其心喪而圖永遠者乎遂閣其床頭所收有詩文若干儘從躬修上流出而方在䛋詩亦不可玩只述狀德之梗概如右而叙之曰 孰爲生斯孰爲粒斯使於斯二者知所當爲者爲誰是故聖門曰生於三事如一視斯事之之爲可諒其師之有範斯其之師之阡過而不起敬者有誰 著雍執徐之歲三月下澣 密陽 朴寅燮 謹述 죽사공묘갈서(竹史公墓碣叙) 생각하니 고원율현금성(古原栗縣金城)의 동편에 문생 三十여인이 그 스승을 장사한 땅이 있는 것을 남방에서 입으로 외우는 바이다. 스승의 성휘는 조기섭(驥燮)이요 자는 경량(京良)이며 옥천인인데 금자광록대부태사공 휘 여(璵)의 후손으로 아조에 들어와 여러대를 작록이 혁혁하였고 못을 건너부동(涉潭府東)에 또 명경 一과(明經)가 있었으며 증조 휘 돈석(墩錫) 조 휘 한영(漢泳) 고 휘 동철(東哲)은 다 벼슬 안하고 행의로써 성문이 있고 외조는 광산김현석(金鉉碩)인데 문정공 태현(台鉉) 후손이었다. 공이 어려서 중부에게 취학하니 중부가 그 재주가 과하여 하도탁서의 기수우수(河洛奇耦)와 점대(蓍揲)을 손사이에 낀 것 같은고로 근심하여 전치않고 사이로 스스로 개발한 곳이 있었다. 중년에 가세가 떨치지 못함을 너무하여 점차 산업을 이루고 이에 마암(馬巖) 곁에 둬간집을 짓고 향방에서 온학도를 사랑하여 정성들여 가르치며 항상 효우는 근본이요 문예는 그 다음인데 내가 일찍 끝에 매달려 근본을 상한 일이 많은고로 마침내 심한 종신지통이 되었다 하고 혹 눈물을 흘릴때가 많았다. 경술(庚戌)년에 五적이 기군 망국함을 듣고 비분강개(欺君亡國悲憤慷慨)하여 자조 산 지아비와 들늙은이로 더부러 류치(流峙)사이에 아득히 놀며 울푼것 같고 노래한 것 같으니 사람이 그 연유를 알지 못하였다. 무오(戊午)년 섯달 二十一일에 고종(高宗)의 승하 소식을 듣고 미음을 마시며 다음 五일에 문인 자사를 거늘이고 후원정결한 장소에 나가 원한을 통곡하며 오래도록 안정치 못하니 촌중로소가 와서 곡하고 위로하며 비로소 지난해에 읊푼 것 같이 노래한 것같이 한뜻을 알았다. 九년뒤에 다시 갈대 사립문을 닫고 병인(丙寅)년 三월에 향년 七十五세로 별세하고 생년은 一八五二(哲宗壬子)년이며 배 경주이씨 규연녀(配 慶州李氏 圭淵女)는 문충공익재(益齋) 후손으로 일찍이 부덕이 있었는데 다만 三녀를 두어 고석주(高碩柱) 박연상(朴燕相) 최태현(崔台鉉) 처며 다 명족이었다. 중제 두섭(斗燮)의 아들 철하(喆河)로 후사를 삼아 옥천 대성설씨(薛氏)를 취처하여 여경이 진진하였다. 이해 춘정에 三十여사람이 시습안(時習菴)에 모여 상의하되 우리 마암선사(馬巖先師) 대상이 임박하니 비록 제위토를 못샀으나 석의는 연타(延拖)할 수 없다하고 나의 종인 락빈(洛彬)을 보내 간청하여 가로되 자네가 상신으로 붓을 안잡은 줄아 나 다만 서술하고 명을 아니함은 선철(先哲)이 한 일이니 이와같이 해달라 하고 무릇 세번와서 말이 더욱 성근하므로 내가 생각하니 국변(國變)이래로 륜강이해이(倫綱解弛)하여 인군과 어버이도 즐겨 슬프하고 소복 아니한 자있는데 하물며 스승께 깊이 심상(心喪)하고 또 영원히 전하고저 함이겠는가 이에 깊이 감동하여 다만 장덕(狀德)의 대략을 이상과 감이 기술하고 서하여 가로되 누구를 위하여 이에서 났으며 누구를 위하여 곧 먹였는가 가령 이 두가지를 마땅하게 할바를 아는자 누군가 이런고로 성현의 말씀에 군사부(君師父)를 一체로 보아 이에 섬기는 것이 올타 하였다. 그 스승의 끼친 규범을 생각하여 그 스승의 묘도를 지내며 일어나 공경 아니할 자 뉘있으리요 戊辰三月下澣 밀양(密陽) 박인섭(朴寅燮) 근술(謹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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